“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네크라소프
젊은 날의 유시민이 인용했던 유명한 싯구이다. 나는 이렇듯 거창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국가의 역할이 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 쯤은 무겁게 느끼며 살아가는 측이다. 동시에 인류보편적 측면에선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민족주의와 유사하게 위해한 일이 된다는 것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스무살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중 광주민중항쟁편을 읽다가 전두환 도당의 폭압과 꽃처럼 스러져간 원혼들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감정은 아니더라도 나라 걱정 때문에 걸맞진 않더라도 불쑥 화병처럼 울화가 치미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왜 나라 걱정을 하는가?
국가는 하나의 조직이다. 국가가 통치하는 영토가 있고, 또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 있다. 국가는 외적으론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인 것이 국가이며, 그것은 자국의 국민들을 위하는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고, 어떤 면에서 이런 식의 국가통치가 진정한 우익의 면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런 국가나 민족의식의 폐해를 우려하고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소통을 원하는 것이 좌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구 선생을 존경하면서, 맑스를 존경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합치 될 수 없는 두 사람이지만, 나는 두 사람을 존경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영달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백성의 해방과 억압받는 전세계 노동자의 이익을 위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 정권 때문에 나라가 걱정되는 것이다. 대통령과 대통령 주위의 소수만의 이익을 탐하고, 비록 국가라는 조직하에 있더라도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걱정과 분노가 앞서는 것이다. 부를 집중시켜 재벌집단의 이익을 극대화 하여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의 총량의 숫자만이 높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특정 지역, 특정 학교의 기득권이 더욱 공고화 되고, 뉴라이트라는 이름 하에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헛짓거리들이 판치니 독립운동하던 선조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통한의 피를 쏟을 지경이다.
올림픽과 월드컵 그리고 춧불시위는 냉정하게 말해 애국이라기 보다는 공동의 축제이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동질감이며 열정이다. 그리고 개인의 즐거움과 이기주의가 평화로운 방식으로 광장에 모이게 극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되 그 구성원 공동체의 규범이 강하게 지켜지는 것이며, 힘이있건 힘이 없는 사람이건 간에 그 규칙을 깨는 사람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아직까지 건재한 친일파, 군부독재 세력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게다가 이번 정부는 그것을 더욱 노골적으로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너와 내가 연관이 있다는 내가 손해를 보면 누군가 이익을 보고 그것이 쌓이고 교류되어 공동의 선이 되는 그런 의식과 전통이 점점 결여되고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이 선의의 경쟁에 의해 발현되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보람이 없어지니, 지금 정부가 기업인을 마구잡이로 사면하고, 삼성 문제에 면죄부를 주고, KBS, YTN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어도 광장으로 나아가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대통령, 혹은 니가 이건희라면 안그랬겠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있냐" 라는 의식이 부정부패에 관대해지고, 물신주의를 만연케 하고, 친일파가 여전히 득세를 하는 광우병보다도 무서운 그런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공동체 의식, 착한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바보가 아닌 세상, 백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쇠고기 재헙상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며, 이 일은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도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