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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각종감상문 2006. 4. 13. 17:09

    개인적으로 궁궐중에서 덕수궁을 가장 좋아한다. 무슨 역사적인 사실에서 유추하거나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곳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릴적부터 들어왔던 덕수궁의 이미지와 실제로 가보니 아기자기한 구조가 마음에 들어서 이다.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석조전의 아름다움과 단신의 소나무들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궁궐은 조선왕조 초기에도 있었다고 한다. 정종 2년(1400)에 상왕(上王)인 태조를 위하여 개성에 궁궐을 건립하고 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 하였고, 태종이 서울에 태조궁을 건립하고 그 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 하였다. 그리고 덕수궁과 비슷한 이름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후에 거처하였던 수강궁이 이었다. 지금의 덕수궁은 본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고종은 1907년에 순종에게 황제를 물려주었고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으며 고종은 계속 이 궁에 거쳐하였는데 이때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곳은 왕족의 집을 왕궁으로 사용한 곳으로 선조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해 10월 서울로 돌아오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가 불에타 거처할 궁궐이 없었으므로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행궁(行宮, 왕이 나들이시 잠시 머물던 궁)으로 삼아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궁의 이름을 정릉동 행궁 또는 시어소(時御所, 왕이 임시 거처하는 곳)라 하였다.

    고종32년(1895) 8월 20일 일본인 불량배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당하는 참변(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듬해 2월 고종은 경복궁에서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였는데 이 때 왕태후(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와 태자비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공사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경운궁으로 옮겨가 있도록 하였다. 그 후 고종은 약 1년만에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오게 됨에 따라 경운궁은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무렵 여러 건물을 다시 짓거나 경복구에서 일부 건물을 옮겨 오기도 하였다.

    1897년 8월 16일에는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10월 11일에는 새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였으며 10월 12일에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후로도 계속하여 여러 건물의 수리와 건립공사가 있어 다른 궁궐에 비해 거의 손색이 없는 궁궐로 새롭게 꾸미고1902년(광무 6년) 10월 19일에는 경운궁의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 때의 중화전은 2층의 규모로 매우 웅장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 함녕전에서 불이나 중심부의 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리게 되었다. 그 후 중건공사가 있었다.

    덕수궁은 처음부터 왕궁으로 계획되어 각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왕의 친척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피난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오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 버려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이곳을 임시 거처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변 지형을 보아 좋은 위치로 선택된 곳이거나 궁궐배치 제도에 따라 상당한 격식을 갖추어 시작된 궁은 아니다.

    그래도 고종때에는 어느정도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고 많은 건물도 세웠으나 일제 시대에 대부분이 철거되고 궐역도 축소되어 현재 덕수궁의 면적은 18,635평이며 궐내에는 정문인 대한문과 외전건물인 중화문, 중화전, 덕홍전, 내전건물인 함녕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그리고 광명문 그외에 정광헌, 석조전 등 다수의 양식 건물들이 산만하게 남아 있다. 또한 궁 주위로 인접하여 고층건물들이 세워져 있어 경관상으로도 좋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덕수궁은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나 파란만장했던 한말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궁궐이라 하겠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1906년 5월 고종의 비서승인 풍수의 대가 유시만의 건의에 따라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1960년대 도시계획에 따라 덕수궁 궁성이 뒤로 물러나게 됨에 따라 대한문만 혼자 길거리에 나앉아 있다가 담장이 있는 곳까지 14m를 뒤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옮기는 작업을 하여 세상사람들은 '대한문이 걸어간다'라고 말하면서 놀라워 했다고 한다.

    건물 형식은 궁궐 정문으론 드문 단층으로 지어졌으며 동향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기둥위에는 공포가 많이 배열되어 있는 다포식(多包式)으로 꾸며져 화려하다. 지붕은 다른 궁궐과 같이 우진각이다. 도로를 새로 조성하면서 대한문의 석계단은 매워져 온데 간데 업고 석계단 좌우에 위엄있게 버티고 앉아 있을 서수(瑞獸)만시멘트 바닥 위로 몸만 살짝 나와 있어 애처롭기 그지없다. 궁궐 주인의 운명과 함께 위용과 영광은 사라져 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인 석조전은 당시 정부의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의하여 일본인들의 기를 죽일 양관을 지을 목적으로 광무4년(1900년)에 착공하여 융희3년(1909년)에 완공된 황강암 석조 건물이다. 건물은 3층으로 구성되었는데 1층은 시종인들의 대기장소이며 2층은 황제의 접견실로 3층은 황제.황후의 거실 및 침실 등으로 준공을 보았으나 당시 고종에게는 실권도 큰일도 없었으므로 외인을 접견하는 데 이용되었다. 1919년에는 이 석조전에서 일본 미술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광복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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