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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경궁
    각종감상문 2006. 4. 13. 17:09

    창경궁은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가본 궁궐이다. 어릴 적에 물론 난 기억은 안나지만 창경원이었던 시절에 부모님과 동물 구경하러 갔었던 적도 있는 곳이다. 한 국가의 궁궐이 동물원이 되어버린 역사적 치욕을 지닌 창경궁은 바로 반세기전 겪었던 우리 조상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주로 종로에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남는 시간에 가본일이 몇번 있었다.



    입장료를 낼 때 특이하게도 26살부터 700원이 되는 나이제한이 인상 깊었고, 또한 한복을 입은 사람은 무료 입장이라는 안내문도 인상 깊었다. 시내 중심인 종로 한복판에서 그곳을 들어가면 완전 딴 세상같은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종묘에서 다리를 건너 창경궁을 갔을때는 그냥 중간에 다리로 이었나 싶었는데 그것이 일제시대에 일본놈들이 우리의 정기를 끊는다며 궁궐 사이에 도로를 건설했다는 설명을 듣고 망극한 기분이 들었다.

    창경궁을 세운 동기를 알아보면 창경궁은 조선 전기인 성종(1469-1494)때 지은 궁이다. 왕실의 웃어른들을 따로 편하게 모시려고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있는데도 하나 더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창경궁을 지은 자리는 비어 있던 공터가 아니라 수강궁(壽康宮)이라는 궁이 있었던 자리이며, 이 수강궁을 대폭 수리하여 완전히 새롭게 만든 다음 궁 이름을 창경궁(昌慶宮)이라 붙인 것이다.

    수강궁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으면서 아들이 있는 창덕궁 옆에 궁을 짓고 아들을 돌보았다. 그런 곳에 창경궁이 들어서게 된 동기는 성종이 여러 대비들 즉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의 비(정희왕후),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계비(안순왕후) 및 성종의 생모인 덕종비(소혜왕후) 들이 이 곳에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돌아가신 선왕의 부인들이 왕궁안에서 왕과 함께 거쳐하는 것이 미안하여 왕궁 밖의 장소에서 살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선왕의 부인인 대비의 거처는 원래 왕궁 안, 왕의 침전 가까이 뒤쪽(북동쪽)에 있는 것이 원칙이다. 왕실내의 최고 어른으로서 아침 저녁으로 왕의 문안을 받는 대비나 대왕대비이기에 왕의 침전 및 왕비의 침전에서 가까운 거리에 사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은 달랐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이 분들을 모시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으나 경복궁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불법적으로 빼앗은 곳이어서 세조의 자손이 거처하기 민망하였다. 그래서 창덕궁을 수리하여 대비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왕비 윤시 폐출(1479), 사약을 내린 일(1482), 새 왕비 책립(1480), 여진정벌(1479) 등 왕궁 안팎의 복잡한 사건으로 수리가 미루어 졌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성종에게 대비들의 막후 조언이 큰 힘을 발휘하였겠지만, 어렵게 왕위를 계승한 성종이 통치자로서의 권한을 확보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웃어른들의 지혜가 실천에 옮겨져 그 후 이 왕궁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 시대는 지금 텔레비젼에서 ‘왕과 비’라는 드라마에서 방영해서 본 기억이 있다.

    창건 당시 창경궁의 모습을 알려줄 자료로는 서거정이 지었다는 건물 이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전(殿)은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이라 하고 당(堂)은 양화당.여휘당, 각(閣)은 사성각이라 했다"는 데서 적어도 전(殿)이 7채, 당(堂)이 2채, 각(閣)이 1채 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더 지어지고 불타 소실되기를 반복했겠지만 대략 각 건물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명정전은 조회를 받는 정전이고, 또 건물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정(政)'인 경우는 정전이나 편전이기에 문정전은 이름만으로도 편전(신하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건물) 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전각들 중 통명전과 경춘전은 대비전이었던 것 같다. 명정전 뒤쪽에 함께 배치되어 있었던 수녕전과 인양전의 쓰임새는 불분명하지만 임진왜란 뒤인 광해군 때 재건되었다가 곧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으며 인조 때 이를 중건하면서 수녕전은 다시 짖지 않았고, 인양전터에는 인경궁에서 옮겨온 재목으로 지금의 함인정을 지었다. 그리고 수강궁터에 있었던 구현전 및 광연정을 성종 17년에 고쳐 짓고 춘궁(동궁:왕세자의 거처)인 저승전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세자의 거처를 성종 때부터 이미 창덕궁에 두지 않고 창경궁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며 광해군 때(1616)의 건물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1607년에 준공된 것이므로 그보다는 약간 늦으나 다른 궁궐의 문보다는 앞선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면 3칸에 측면이 2칸이며 다포계 중층 건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우리 건축에서는 서양에 비해 문의 비중이 매우 높다. 단지 사람이 드나드는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다. 문은 담에 이어져 있고, 그 담은 공간의 성격을 구획 짓는다. 홍화문은 백성의 세계에서 천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래서 위엄이 있게 보이도록 치장을 많이 한다


    회사 일한다고 바쁘긴 바빴나 보다. 이 블로그를 만들고 나서 2번째로 여백의 미가 창연한 대문을 보고야 말았다. ^^; 새로 느낀 것도 없이 글을 올리기 보단 10년전 학교 과제 겸 썼던 창경궁에 관한 글을 올려 본다.  이것도 성의 없긴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내 자신의 기록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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