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매우 도발적이다. 도발은 좁은 시야각과 충격을 동반하는 속성때문에 보통 한방향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도발적임에도 동시에 다양한 시각과 다채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작품은 크게 1화는 반전이 있을 것 같은 추리물 2화는 교권이 무너진 학교 3화는 소년 개인의 내면을 탐색하는 상담사와 대화 4화는 진실 앞에 회고하는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들 감탄하듯이 롱테이크, 롱테이크 그리고 롱테이크다
아마 가장 핵심이 되는 대화는 말미에 소년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툭하면 벨트로 자신을 때릴 정도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 '나는 저런 아버지는 되지 않겠어'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나서 벌어진 아들의 범죄...아무리 전 세대와 비교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편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가 상담사와 시간이 아니었다는 게 의아했다. 표변하는 남성성, 감춰진 학교 생활에 대한 조각들은 밝혀졌지만 현상만 주시하고 고정관념이 팽배한 명백히 실패한 상담이었다. 상담사는 소년을 독립된 인격체를 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제목대로 청소년기(Adolescence)이다 그래서 소년이다. 이를 간과하면 현상만 보이고 현상에선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폭언, 난폭한 행동, 여성혐오, 왜곡된 남성성, 버릇없음, 충동적 살인만 보이게 된다.
자유를 주장하나 방임은 아닌지, 자율을 조장하나 방관인지, 존중을 추구하나 착함을 핑계로 뒤로 숨는 것은 아닌지, 부모가 이전 세대의 가정폭력에 대비해 지금의 위선을 자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아이를 키울 때 한가지만으론 안된다. 자유를 주되 규범이 필요하고 허용을 하되 훈육이 동반돼야 하며 사랑을 하되 소통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작품에선 인터넷, 아이폰, AI의 등장으로 첨단화된 네트워킹 시대 그러나 단절되고 고립된 현실, 비판이론으로 전개된 학교 교육의 몰락 그리고 부모도 교사도 친구도 이웃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불안과 책임감의 부재를 잘 그려내고 있다. 롱테이크를 이용한 몰입은 리얼리즘을 넘어 화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현실감마저 느끼게 한다.
르네상스란 무엇인가, 흔히 알고 있는 문예부흥도 있겠지만 가장 큰 변화는 옛것을 재해석해서 지금의 시대를 개선하고 인간적인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애를 손찌검하고 폭력적 말을 서슴치 않았던 그 시절보다 무언가 결핍된 지금을 고발한다. 예전의 가부장적인 세태가 낫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책임과 관심을 재해석하자는 의미로 파악된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지금이야말로 개인을 보호해주고 사랑과 고통이 혼재하는, 희망과 절망이 시작되고 변화할 수 있는 곳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덧) 오은영의 프로그램을 보면 문제아동의 거의 대부분은 '콩콩팥팥'이다. 특히 문제가 심한 경우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부모인 경우가 많았다. 베른하르트 부엡의 <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책에선 지나친 관용으로 균형잃은 교육의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자유만큼 규칙과 권위도 중요하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것으로 오해받기 쉬운 권위가 아닌 어른다움, 부모다움의 권위 속에서는 아이를 더 안정감있고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덧) 이 작품은 마치 서로 사랑하지 않고 싸우고 불안정적인 부부 밑에서 크는 것보다는 이혼하는 갈라서는 편이 아이들에게 좋다라는 주장과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부부가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이혼만은 안된다, 혹은 성인이되면 갈라서자는 두 주장이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관심과 표현이다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