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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국열차(Snowpiercer, 2013)
    영화이야기 2014. 1. 2. 12:42

    설국열차
    ★★



    “만약 <설국열차>가 한 권의 책이고, 내가 도서관의 사서라면 처음에는 이 책을 사회과학 코너에 분류하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자연과학 중 초기 지구의 환경을 조성해 생물체가 없었던 환경에서 자연적인 조건을 통해 생명체 탄생의 시초를 밝히려 했던 밀러-유리의 아미노산 실험에 관한 논문의 옆에 놓으려다가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망설이며 토정비결 옆에 꽂아두고 다시는 꺼내 읽고 싶지 않을 것만 같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하층민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열차라는 설정은 인간의 투쟁과 진보를 담기 위한 알레고리의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유사이래 인류의 사회 구조의 한계에 대한 냉담한 비유로 볼 수 있다. 마치 죽음과 죽음 사이를 가느다란 열차라는 스트링 우주관을 통해 인류의 생존 자체를 냉소하는 여정이다. 열차 칸마다 계급, 공권력, 인구론 등 인간, 사회, 문화, 역사의 문제를 담아낸다.


    마치 그것은 게오르크 지멜의 다차원적 모더니티 담론과 그걸 연구하는 방법론과 유사하다. 마치 주류 과학에선 살에 돋아난 염증을 보고 치료를 서두른다면 지멜의 그것처럼 현미경을 들이대고 세포의 상호작용과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열차 속에서 모든 것들은 죽음의 회피에 몰두하지만 정작 생존의 문제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유한한 인류에 관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의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폭주기관차와 노아의 방주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적 특성은 시간과 공간이 무척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열차라고 하는 형태의 공간 설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인류의 모든 유산을 압축시켜 형성하는 틀이 된다는 점이다

     

    감독 봉준호는 예전부터 자신이 설정한 공간을 활용하여 시간을 비틀어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가족이 중심이 되는 인물들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탁월하다. 전임 교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팔아야 하는 지식인과 10년이 훌쩍 넘게 일한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는 아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플란다스의 개>는 아파트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군상들의 슬픔을 유머와 블랙코메디로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의 추억>은 실제로 존재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80년대 당시 시위 진압때문에 전경 요청이 되지 않는 장면에서 스릴러와 유머를 섞은 재미있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폭압과 아픔을 등치시키는 연출력은 동시에 한국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그야말로 진짜 '한국 영화'였다고 평할 수 있다. 


    미군이 독극물 성분을 한강에 방류했던 ‘맥팔랜드 사건’에서 탄생한 작품 <괴물> 역시도 <킹콩>이나 <고질라>와 같은 괴수영화가 한참을 궤를 달리하는 이유 역시도 한 해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투신하는 한강이 괴물이 있음직한 산업사회의 애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8-90년대를 거쳐 성인으로 성장한 30대 감독 봉준호에겐 현실과 전혀 분리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선입견과 일반적 기대로 인해 막연히 한강의 고질라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함량 미달일 수도 있는, 한국적(!) 괴물영화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천만명이 넘는 열렬한 호응을 얻어내게 된다.


    <괴물>과 궤를 같이하는 <마더> 역시 한 마을에 일어난 살인을 통했지만 가족의 해체를 봉합하는 엄마의 어긋난 분투를 그린다.


    설국열차의 시사하는 점은 미래시대를 차용한 압축이다. 단순한 열차 속의 압축도 있지만 물리학적으로 스트링 유니버스라는 시공간적 차원의 압축까지 포함한 개념이며, 이를 통해 다차원의 세계를 표현했다기 보다는 인류가 생긴 이래의 모든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열차의 존재는 탁월하다.


    이런 맥락에서 열차라는 공간은 감독의 전작에 비해 가장 함축적이고 도발적인 모티브이다. 다시말하자면 공간을 압축하여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한 두 사건의 조합이 아닌 인류 전체를 담아내고자 하는 거대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차는 단순히 인류의 마지막 표본을 노아의 방주처럼 꾸역꾸역 넣지도 않는다. 마치 죽음과 죽음을 관통하는 끈, 즉 스트링의 세계를 마치 생존 자체인 것으로 인식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회의적 측면이 크다.


    물리학에선 여러가지 차원의 개념이 있다.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는 단순하게는 1차원부터 시공간을 의미하는 4차원까지 넓게는 끈이론에서 가정하는 10차원까지의 세계를 증명하고자 한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이런 차원의 관점을 싣고 있다. 다양한 차원은 각기 다른 시각이 가능하게 되며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세계관이 생겨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멀리서 바라본 다리가 하나의 1차원적 물체 즉 끈처럼 보이는 것처럼 열차밖 외부의 아주 높은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열차 역시도 마치 대기권 밖에서 보이는 만리장성처럼 하나의 가느다란 실 같은 형태이거나 아예 안보일 수도 있다. 결국 이와 같은 관점은 영화 속 열차의 창시자인 윌포드의 주장은 물론 커티스로 대변되는 모든 탑승객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작동하지만 거시적 시각에서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


    감독은 물리학의 2차원적인 세계와 폐쇄된 생태계를 상징하는 열차라는 설정 안에 인간의 모든 것들을 압축해 놓고 벌이는 사고 실험과 같은 형태로 운행을 시도한다. 이와 같이 공간의 한정성이 주는 상징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크게는 압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공간이란 점이다. 어떤 면에서 과학자들이 즐겨쓰는 사고실험이 가능한 것이며 특히 <설국열차>의 경우에는 전인류를 대상으로 가상적 실험결과를 내어놓는 거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단순히 쌍을 맞춘 노아의 방주의 압축과 다르다. 그래서 열차라는 압축과 패쇄 생태계라는 세계관이야 말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각색한 <폭주기관차>는 열차를 멈추고 탈출하기 위한 사투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삶과 자유 그리고 인간 본연의 이타적 희생을 담고 있다. 이에 반해 <설국열차>의 열차는 기차가 멈추지 않아야만 하며 누구도 열차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무한정 달리는 열차 안에는 CW-7로 촉발된 인류의 위기상황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현상을 유지하려는 타협과 그것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는 도그마만이 가득하다. 두 열차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선 두 영화가 열차라는 설정의 유사성 말고는 설국열차와 노아의 방주보다도 폭주기관차와의 거리가 훨씬 더 멀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이 있다는 것이며 이 이성적 특성이 가장 발현되는 부분이 바로 죽음을 추상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동물도 죽음에 직면해서는 슬픈 감정을 내거나 이상 행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무덤을 만들진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관념화의 예시다. 인류는 지구온난화라는 재앙으로 인한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CW-7 가스를 살포하고 이로 인해 빙하기가 찾아오자 유일한 생존의 도구인 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아비규환을 겪는다. 이렇게해서라도 겨우 꼬리칸에 탑승한 사람들은 다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식인이라는 끔찍한 일도 불사하게 된다.


     한편 머리칸의 사람들 역시 죽지 않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며 스시를 1년동안이나 기다려 먹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절제에서 죽음의 관념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엿볼 수 있다. 때문에 먹던 먹히던 종의 멸종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꼬리칸의 바퀴벌레나 스시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게다가 열차의 수장인 윌포드는 인류가 살기 위해 독재 체제를 유지한다는 명분에서 나아가 권력 자체를 증여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꼬리칸의 지도자라고 생각했던 버팀목 길리엄까지도 체제수호를 위하 윌포드와 뜻을 같이했다는 점은 인간이 이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부조리에 대한 반전이다. 비록 커티스는 이런 식의 체제유지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역시 이성적이 아닌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따라서 설국열차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죽음’이다.


    앨리어스와 반즈


    압축과 패쇄 그 자체인 열차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은 단순할 수 밖에 없다. 각 칸은 계급을 상징하며 앞칸으로 갈수록 상류층이 차지한다. 단백질 블록 생산공장, 정육냉동칸, 사우나, 나이트클럽, 수영장, 수족관, 치과, 감옥, 교실, 엔진칸 등은 각 계급이 먹는 양식의 종류, 즐길 수 있는 문화, 교육 그리고 꼭 필요한 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각 칸의 의미는 폐쇄생태계란 것과 앞 칸으로 진행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칸막이를 열고 앞으로 전진할 때 퍼즐적인 재미를 선사하기 위한 장치이다. 전체적으론 이 열차의 완전함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다.





    단순해 보이는 열차 칸의 구성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폐쇄된 공간에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부분이다. 즉 1년을 주기로 소비되는 양, 공급해야될 수준이 정량적으로 완벽하게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강력한 통제력은 지도자의 권력에 대한 확신을 배가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반인륜적인 것은 수치와 계산만 있을 뿐 그 안에 인간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차가 운행하기 위한 부속이 고장나 조달이 불가능하다면 어린 아이를 부속대신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영화 말미에 커티스가 열차의 시스템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동조할 수 없게 만들게 된다.


    이 단순한 사회에서 인물들 역시 전형적일 수 밖에 없다. 꼬리칸의 정의로워 보이는 마티스는 끝까지 정의로우며, 머리칸의 윌포드는 끝까지 이성적이긴 하나 반인륜적 확신범으로 남는다. 결국 열차밖 세상 즉 열차를 벗어나는 것은 죽음이라는 의식은 두 사람 모두에겐 동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체제를 신봉하는 밝은 면과 어두움을 상징하는 두 사람은 마치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했던 <플래툰>의 반즈와 엘리어스처럼 반목을 보이긴 하나 그저 맹목적으로 체제를 수호하는 데 여념이 없다. 반즈와 엘리어스 역시 자신들의 조국의 전쟁 자체를 반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소대 내부에서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진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반즈는 철저히 성과 위주로 그리고 무섭도록 이기적인 입장이었다면 앨리어스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앞세웠다는 차이다. 결국 무섭도록 광활한 베트남의 정글에서 배신당한 앨리어스는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전쟁의 정당성은 별개로 하더라도 비이성과 야만이 가득한 전장에서도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의 인간성이라는 것을 굳건히 붙잡아 주고 있다. 앨리어스가 하늘 드높이 올려 부르짖다가 고개를 떨구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정신을 <설국열차>에선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갈등과 번목은 커녕 그 시스템을 지탱하는 두 인물, 즉 윌포드와 길리엄은 그저 열차가 운용되고 지속되는 것과 이것을 적합한 인물에게 증여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 숨막히는 철벽 같은 이 두 사람의 전형성이야 말로 막힌 세계란 열차를 한번 더 증명해주고 있다. 때문에 밖이던 열차 안이던 생존이라는 프레임에는 각자의 에고가 없으며 자신 조차도 하나의 요소로만 보일 정도로 전형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해 진다.


    네오 그리고 푸코적 인간 남궁민수


    주인공을 살해하려는 악당은 끝까지 죽이려고만 들며 향락의 클럽이 갖춰진 유흥의 칸에선 춤추기 바쁘고, 총리인 메이슨은 지배자의 권위에 기대어 현상적인 유지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추상 같은 공권력은 말 그대로 화석처럼 굳건히 열차를 지탱해 나간다.


    이 무시무시한 마지막 인류의 끈은 저항 조차도 통상적인 패턴이 되어버린다. 적당한 기간에 반란이야 말로 꼭 필요한 것이 된다. 그래야만 인구론적으로 수요와 공급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야 말로 이 영화와 가장 흔하게 비교되곤 하는 <매트릭스>의 세계관과 완전히 분리된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은 자유에서 도피를 토대로 하는 매트릭스 세계관은 적어도 시스템과 인간의 욕망은 상보적이다. 인간은 표피적인 욕망에 순응하고 기계는 인간의 몸에서 뽑아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실상은 기계에 기만 당하는 왜곡되어 있는 가상의 구조이며 매트릭스가 유지되는 것은 더 이상 발 디딜 곳 없는 억압과 폐쇄가 아닌 무지 때문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의 네오는 각성을 통해 주체적 선택이 제공 될 수 있는 것이며 6번의 네오가 또한 매트릭스를 6번 부팅해도 시스템은 인간을 경계하거나 관리하지 인간 자체를 부정하거나 단편적으로 해석할 정도의 차원은 아닌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열차는 폭력성은 이 시스템 자체가 인간 스스로 선정한 한계와 프레임에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이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남궁민수다. 그는 열차의 보안장치를 설계한 기술적이며 현재는 일종의 마약인 ‘크로롤’에 쩔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열차에서 태어난 특별한 숙명을 지닌 그의 딸 요나 오직 그 둘만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이다.


    그의 행동과 사고는 푸코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푸코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거부터 계속해서 지금처럼 있어왔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믿는다.” 이 부녀는 바로 이러한 도그마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며 창문 밖의 세상에 관심을 갖고 이 열차는 자발적으로 탈출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다시 푸코의 말을 빌자는 “인간은 역사의 흐름을 ‘지금·여기·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화해 온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향해 곧바로 흘러왔고, 세계의 중심은 ‘여기’이며, 세계를 살고 경험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재판부는 ‘나’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윌포드부터 길리엄 그리고 최후의 순간직전의 커티스까지도 열차만이 생존가능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게 되는 것이 설명 가능해진다.


    푸코는 “역사의 흐름이 ‘지금·여기·나’에 이른 것은 다양한 역사적 조건이 예정 조화적으로 종합된 결과라기 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이 배제되어 오히려 점점 홀쭉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 푸코의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 시스템에 의해 구속받게 된 결과가 홀쪽해진 세계관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푸코적 시각에서 볼 때 ‘열차’라는 매개체가 마치 짜맞춘 듯이 들어맞는다.


    남궁민수는 열차 속에서도 고독한 존재이다.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뜻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매트릭스>의 네오와 유사하다. 하지만 네오는 이미 예정된 초자연적 메시아라고 한다면 남궁민수는관찰과 분석이라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이 홀쪽해진 세계 즉 우상의 세계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마치 광인과도 같은 문제적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화된 체계의 분류의 기준과 다르게 유일하게 이성을 가진 탑승객이다.


    아인슈타인과 나생문


    1915년 우리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과학적 진보를 이룬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해이다. 같은 해에 프랑스의 예술가 뒤샹은 <독신자들에 의해 나체가된 신부>라는 작품을 내고 같은 해 11월 문학에선 일본 도쿄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류노스케가 <나생문>이라는 단편소설을 잡지 <제국 문학>에 발표한다.


    뉴튼 물리학 이후 당시 양자역학이 크게 발전하기 전에 이 세상의 물리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던 톻합 이론인 일반 상대성 이론과 다다이즘이라 불리우는 전쟁에 대한 반작용 혹은 강한 분노에서 시작된 반정부적인 가치와 기성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원초적 욕망에 충실하려고 하는 예술 사조 그리고 극단적인 에고이시즘을 표현했던 같은 해에 일어났지만 각기 다른 분야의 다른 의미를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예술의 통섭이라고 보며 이에 가장 근접한 장치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계는 물론 산업 현장에도 통섭의 바람이 불고 있다. 통섭이란 단순한 물리적 결합을 뜻하는 통합과는 다른 개념이다. 통섭은 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결국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점에 착안하면 인류의 모든 것이 압축이란 결국 사회과학과 생물학 그리고 자연과학은 물론 인간의 비이성적 미신 까지도 모두 함축된 무대가 되는 것이 열차이고 이것을 영화로 풀어낸 것은 최초의 통섭적 영화 만들기의 시발점이 되리라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섣불리 통섭을 이야기하고 융합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기대하고, 분석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끈으로 보이는 세계에선 인류 전체가 꼭꼭 눌려 담겨 있기 때문이며 인류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이 존재한 이후로 쌓아왔던 제도, 감정, 가상, 역사 즉 인류 전체가 고스란히 평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무리해서 물리학적 관점에서 비교를 하자면 무한한 압축이란 우주의 시작이라 여기는 자연계의 4가지 힘인 강력, 약력, 전자기력 그리고 중력이 한데 통일되어 있던 우주의 대폭발이란 빅뱅 이전의 시작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관념에서 이 영화가 통섭에 대한 고찰이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설국열차> 이전에도 영화는 가장 예술적 장르 중에서도 통섭의 개념에 근접해 있었다. 우선 시청각적인 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렇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구성이 가능한 인류보편적인 상상을 담아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만 추구했던 SF장르에서 스페이스오딧세이의 서사적 측면, 혹성탈출의 인간사회의 역사를 반추하는 고발, 소위 테크누아르의 시초라 일컬어지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는 바로 그 크로스오버적 기법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진정한 영화적 통섭이 이루어진다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알레고리에서 훌쩍 벗어나 보다 입체적 효과를 통해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영감을 받게 하여 우리의 혼을 빼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단순히 자신의 삶을 비춰보거나 모사하는 가상의 스크린에서 컷과 컷, 스크린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소위 여백 사이의 행간까지 영향을 미쳐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이 모이고 얘기하고 지식을 나누고 세계관을 정립하는 매개의 단계까지 오르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런 지점에서 그간 보여주었던 작품들의 기조에 비춰 영화의 중반까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편리한 오마쥬에서 벗어나 무언가 독창적 지평으로 질주나가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겁이 많은 사자와 지혜를 추구했던 허수아비와 다정한 마음씨가 절실했던 양철 나무꾼은 노란빛깔이 길을 좇아서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간다. 설국열차의 커티스 역시 여정의 방법은 많이 다르지만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드디어 맨 앞 칸에 있는 설국열차의 마법사 윌포드를 만나게 된다. 도로시가 오즈의 마법사의 허위에 당황하듯이 관객들도 윌포드와 길리엄의 황당한 결탁에 허를 찔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윌포드의 탄탄한 논리와 체제에 대한 확신에 찬 설명에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결말의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은 앞서 모든 것들을 단번에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가령 매트릭스는 이 세상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프로그래밍된 거대한 매트릭스라는 가정하에 인간은 가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소위 빨간약으로 상징되는 '각성'을 통해 네오라는 인류 구원적 존재를 통해 이를 전복하려는 메세지를 던진다. 영화 속엔 기독교적 메시아사상, 동양적 철학 등이 담긴 결코 만만하지 않은 대사들이 쏟아져 나오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적 금권을 풍자한 오즈의 마법사와 연결시키는 'It means buckle your seat belt, Dorothy, because Kansas is going bye-bye. Matrix' 라는 대사만 보더라도 얼마만큼의 고민과 철학적 사유가 동반된 영화라는 증거가 되기 충분하다.





    반면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기계 군단에 의해 핵전쟁으로 멸망한 인류가 몇십대의 함선을 타고 지구를 찾아나서는 과정 속에서 40만명으로 한정된 최후의 인류를 대상으로 정치, 사회, 제도, 불평등, 종교, 과학이 무엇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하면서 로봇이라는 적대적 대상을 통해 인류의 기원과 현재의 불합리를 대비하면서 우리 존재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이 두 영화를 굳이 염두에 두고 비교할 필요는 없으며 그 누가 요구한 적도 없거니와 이 자체가 선입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상이 하나의 계보라 할 때 그만큼 설국열차의 앞칸부터 꼬리칸까지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열차굉장히 대담한 설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도발적인 시도는 그저 롤플레잉 게임처럼 막혀있는 칸막이를 뚫어내는 미션처럼 영화 후반부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가장 앞칸에 도달하게 되고 이 열차의 지배자의 세상에 대한 철학을 맞닥들이게 되고 그냥 끝나버린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은 불평등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멜서스의 인구론처럼 수치적으로도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저마다의 역할과 위치가 있으며 자신은 이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숙명이고 강제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의 모든 이유는 인류의 생존 때문이며, 원래 인류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균형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경악했던 꼬리칸의 사상은 금지된 것이거나 박멸해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필수불가결한 순환이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꼬리칸의 비참함과 앞칸의 허무함이 그리고 자신의 고독함이 그리고 어린아이의 극악한 노동도 그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넌지시 내포하고 있다.


    <설국열차>의 주제는 우리 인류를 다분히 자연과학적 우연으로 바라 본다. 그 극명한 예는 영화 마지막 송강호의 폭탄 한방으로 반증된다. 현재 지구에서 인류 전체라 할 수 있는 열차를 달리는 궤도에서 파괴해버리는 행위가 합리적인 행위인가? 그저 한 개인이 이제는 밖의 기온이 인간이 살만한 것 같다고 추측하고 그리고 나서는 열차 안의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는 것은 반인륜적이기 까지 하지만, 그보다는 인류 자체를 냉소하고 복불복처럼 치부해버린다. 즉 있거나 없거나 필연이든 우연이든 모아니면 도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영화 속에서 파편적으로 보이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나 멜서스의 인구론,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들이 마치 생명체 기원을 실험했던 밀러-유리 실험의 아미노산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제도, 삶, 부조리를 꽤나 자신감있게 <매트릭스>,<배틀스타 갤럭티카>보다도 더욱 단순한 열차 몇량에 넣어놓고 사유를 시도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우주론적 '우연'을 아주 무책임하게 내어놓는다.


    좋게 말하자면 인류에게 인간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단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처럼 판 자체를 부정하는 우연(!)이란 결국 우리 인간은 영원히 불합리함을 반복하는 비참한 존재라는 굴레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해 설국열차 안에 '인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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