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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랜 토리노 (Gran Torino , 2008)
    영화이야기 2009. 4. 13. 23:13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랜토리노'라는 GM의 자동차 이름을 제목으로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거창하고도 거대한 문제를 위트를 잊지 않는 잔잔함 속의 진지함과 가슴을 울리는 마지막 강렬함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문학적 탐구는  보통 변화를 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통상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주인공 자체의 내부적인 인간적 고뇌와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상황으로 이뤄진다.

    그랜토리노의 주인공 코왈스키는 자기 자신 스스로의 문제로 인해 외부에 철저하게 담을 쌓고 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말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현장에 있었던 주인공은 그 속에서 벌어졌던 학살, 무방비 상태인 어린 소년병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자책감으로 평생을 가족은 물론 종교 그리고 이웃과도 담을 쌓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이웃으로 이사온 베트남 흐몽족 가족을 접하게 되고, 우연히 그들의 갱단의 곤경 속에서 구해주는 일을 계기로 그들의 친절함과 인간다움 속에서 그 자신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아 한국전쟁에서 맞닥뜨렸던 동양인이라는 점이 그 자신의 속죄의 심경을 더욱 강력하게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코왈스키와 이웃의 관계란 사실 바보스럽고 수줍은 타오와 영특하지만 나약한 수를 통해서 교감과 평안을 얻었다기 보다는 그들의 박해와 억압을 보고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측면이 더욱 강해 보인다. 그랜토리노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자신의 베란다에 앉아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세상을 바라보던 그는 툭하면 총을 꺼내기 일쑤다.

    나이많은 노인의 현명한 지혜나 갈등의 조정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마치 구약에 나오는 유태인의 신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 보수적인 늙은이일 뿐이다. 방황하는 10대를 거리에서 맞닥뜨렸을 때 누구도 그렇게 강단있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노인에 대한 공경은 커녕 오히려 늙고 힘없다는 이유로 더한 욕을 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굴함이 없이, 성질을 내고 욕을 해대고, 총을 꺼내드는 코왈스키의 당당함이 그의 기질 때문이라기 보단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괴감, 그리고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미칠 때쯤 그는 자신의 몸을 총알받이로 삼는다. 마치 구약과는 다른 신약에서의 예수의 희생과도 같은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져 버린다.

    유추해보면 코왈스키는 자신을 찾아오는 신부에게 털어놓듯이 '삶과 죽음'에 대해 천착한다. 어린 나이에 조국의 명령에 따라 낯선 동양의 한국에서 전쟁을 겪으며 특히 반인간적인 살인을 저지른 충격은 그가 심한 자기 혐오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음은 미뤄 짐작할 수있다. 게다가 의지했던 마지막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 손주들과 관계를 거의 끊어버린 스트레스는 엄청날 것이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죽지 못해 사는 삶 속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속죄의 대상을 찾았을 때, 특히 자신의 분신인 그랜토리노를 맡길만한 소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게에서 자기 스스로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의 이러한 희생에서 과연 삶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인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영화를 조금 까칠하게 보자면, 대입에 의한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왈스키를 보수적인 미국으로, 흐몽족을 주체적이지 못한 아시아로, 갱단을 테러나 일삼는 깡패국가로 치환해 버리면 이 영화는 순식간에 미제국주의를 우화적으로 칭송한 불순한 영화로 둔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자유지만, 영화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화이다. 거대한 국제 담론을 담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강박이란 생각이 든다. 상처받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고 이웃의 삶을 공유하려는 의미를 피부색을 통해서 규정짓는 것은 까칠함을 벗어나 폭력적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서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더티해리처럼 멋진 총솜씨를 보이면서 악당을 일망타진할 거란 기대를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면, 또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참회의 순간을 믿지 못한 우리 자신들의 불경함을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했다면, 코왈스키는 저세상에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시니컬한 미소를 지어보였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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