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5년만에 공지영의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하지만, 봉순이 언니 이후론 아직까지 장편 소설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소설집이라 함은 단편 소설을 묶어 놓은 형식이기 때문에, 연작이라 하더라도 단편은 단편이다.
공지영은 스토리텔링이 강한 사람 이다. 김윤식에 의해 '후일담 문학'이라는 정의 했듯이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그때의 삶을 조명하거나, 최근에는 지난 날의 아픔을 현재와 연결 시켜 재조명하는 내용의 소설을 주로 내고 있다.
따라서 순발력이 있거나, 하나의 굵은 인상을 주거나 하는 단편에서는 그다지 진면목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에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60년대 독일로 건너 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독일 사람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어 베를린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 단편을 연작으로 묶어내었다.
여전히 작가 특유의 감수성과 쉬운 문체로 보는 이에게 신뢰감을 주며, 이야기를 쭉 읽어 연결하여 보면 80년대 학번들의 그 시절과 현재, 그리고 향수와 열정을 되뇌이게 만든다.
이번에는 여기에 더하여 하나의 르뽀를 보는 듯한 꼼꼼한 취재까지 더해져 그가 밝혀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임수경 방북사건과 관련된 사촌형의 이야기와, 베를린서 기차를 타다 우연히 여권에 동독 스팸트가 찍히게 되어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게 되는 엄마의 이야기 들이 나오며, 와병중에 "자신을 광주에 묻어달라"는 광주항쟁을 직접 취재했던 위르겐 힌츠페터씨와 만남을 통해 희미해진 광주의 정신을 되새기는 이야기 등이 그렇다.
이처럼 베를린은 우리 나라와 유사한 역사적 환경에 더불어 우리들의 아픔과 더불어 아직도 그 아픔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인연이 깊은 도시인 것이다.
분단과 아픔과 희생의 공간에서 그들이 꿈꾸는 공간인 '별들의 들판'은 역시 베를린에 있지 않았다..
최초로 5.18을 세계에 알린 '광주비디오'의 주인공
제2회 송건호언론상 수상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지난 2003년 5월 18일에 방영된 일요스페셜(KBS 1TV)은 5.18 특집이었다. 80년 광주 이후 대학가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관심 있는 자라면 안 본 이 없을 정도로 널리 상영된 '광주비디오'가 23년만에 한국에서 방송 전파를 탔다. 그 '비디오'를 직접 촬영한 한 독일 기자의 생생한 증언과 회고를 함께 곁들여서.
그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66) 독일 공영방송 ARD-NDR 전 동경특파원이 2003년 12월 5일 제2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았다. 송건호언론상 심사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힌츠페터 님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들어가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촬영했으며, 이 비극적인 사건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힌츠페터 님이 촬영한 영상 자료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객관적인 사실을 증언하여 국민의 양심을 깨웠고 소중한 불씨가 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습니다. 이제 그 자료들은 현대사의 귀중한 기록물로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라며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바로 그 '푸른 눈의 목격자'
시상식을 위해 한국을 다시 찾은 힌츠페터 씨를 만났다. 기자가 "한국인들이 당신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청암언론재단이 대표해 표현한 것 같다."고 인사하자 그는 "이 상은 나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다. 가슴 벅차고 영광스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힌츠페터 씨는 70년대부터 ARD-NDR 일본특파원으로 있으면서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 취재했다. 1986년에는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중 사복경찰에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일본에 오기 전에는 캄보디아, 베트남 취재 와중에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취재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회사에서 이 지역 피난민과 국경상황을 취재할 기자를 모집할 때 지원했다. 백색크메르지역을 통해 들어가 2주 간 취재했는데, 매우 위험한 상황이 전개됐다. 거의 매일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아시아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는가?
"특히 한국에 대해 관심이 컸다. 1968년 한국에 처음 왔는데, 당시 무장간첩들이 서울 입구까지 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독일도 동서로 갈려 있었고, 한국처럼 동독에서 많은 간첩들이 넘어왔기 때문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경 지사장과 본사가 취재 승인을 하고 비용을 지원해줘야 한국에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생각만큼 자주 올 수는 없어 안타까웠다."
80년 광주에 온 것도 본사의 취재지시에 의한 것이었나?
"그날 아침 일본 라디오를 통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낌새를 채고 한국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계엄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밤중이었지만, 본사에 전화로 보고했다. 10분 후 가라는 허가를 받았다. 영상담당인 본인과 음향담당 기자 2명이 비행기를 탔다. 와서는 운전자까지 3명이 함께 움직였다."
힌츠페터 씨는 그 때 방송이 신문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군사정권이 전화 등 모든 통신수단을 끊어놓았기 때문에 기사를 송고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촬영한 필름은 어떻게 방송을 탈 수 있었을까?
"첫날 5롤의 필름을 촬영했다. 나머지 필름을 다 찍어서 보내는 것보다는 중요한 내용을 찍었기 때문에 먼저 내보내 방송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부산으로 갈까 했으나 통제가 심하고 위험할 것 같아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날 둥그런 통에 든 과자를 사서 내용물을 다 꺼내고 필름과 신문지를 넣었다. 짙은 은색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해서 리본까지 달고 결혼선물처럼 포장했다. 공항으로 달려가 출발 5분전에 도쿄행 비행기 1등석을 끊었다. 정장을 하고 선물(?)을 들고 검색대를 유유히 지나갔다. 필름은 다행히 엑스레이 검색을 피했다. 좌석에 앉아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를 정치적으로 성숙시킨 광주"
필름을 가져 나올 때 그는 자신이 최초의 보도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고 했다. 예측은 맞았다. 독일 ARD 방송은 뉴스시간에 세계 최초로 광주를 알렸다. 이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도 힌츠페터의 영상을 사용해 보도했다.
광주의 경험이 이후 기자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 잔혹한 광주는 나를 정치적으로 성숙시켰다. 한국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구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자유, 그러나 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광주에서 돌아온 힌츠페터 씨는 그의 상사 위르겐 베트람과 함께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15분 짜리 특집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80년 9월 17일 8시 뉴스에서 김대중 사형선고를 보도하고 바로 이어 '기로에 선 한국'을 방송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김대중 구명운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광주에서 찍은 필름의 마지막 1cm까지 사용했다."
힌츠페터 씨는 1990년 일본특파원을 마치고 독일 본사로 돌아갔고, 1995년 은퇴해 현재 고향 라체부르크시에 살고 있다. 그의 소망 중의 하나는 1997년 한국에서 출간한 '세계인의 눈에 비친 광주(공저)'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이 책은 7명의 외국 언론인들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회고한 것이다.
"통일 후 동서독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 독일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지 좀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내고 싶은 이유는 한국이 독일에 너무 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절이나 왕릉 등 전통적 유적들도 볼 것이 많고, 서울만 해도 밤 11시가 지나도 활력이 넘치는 재미있는 도시인데…. 한국 제품이 독일에 많이 들어와 있는데도 사람들이 잘 모른다. 한국은 관광객들에게 보다 열려있는 정책을 써야 한다."
"고통이 따라도 통일은 돼야 한다"
힌츠페터 씨는 전형적인 친한파다. 때문에 한국에 기대하는 안타까운 소망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통일은 중요하다. 비용이 많이 들어 고통스러울지라도…. 독일 통일에 텔레비전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서로 주민들이 잘 알기 위해서는 방송교류가 돼야 한다. 양쪽이 같이 하면 좋지만 안 된다면 남측에서만이라도 북쪽 방송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언론의 자유다. 남북한 언론인 교류, 기자들의 상호취재도 더불어 중요하다."
"한국에 오면 아직도 냉전적인 분위기를 탈피하지 못한 것을 느끼곤 한다. 비판적이거나 위험스런 질문을 던지면 마음을 열고 생각한대로 얘기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호텔에서 북한 TV를 못 보는 이유를 물어보면 정색을 한다. 한국이 좀 더 열린 체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곧바로 시상식장으로 자리를 옮긴 힌츠페터 씨는 "태극기 속에서 자리잡은 균형의 상징인 음과 양은 민주적인 한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고, 한민족 통일에 대한 논의는 좀더 진정되었습니다. 부디 우리 함께 보다 나은 한국을 꿈꾸고 기원합시다."라며 수상소감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