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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 임금의 명암
    각종감상문 2006. 12. 13. 01:00

    조선의 제 7대 국왕인 세조임금은 그야말로 명암이 교차하는 임금이다. 이런 식의 희비가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임금이 있다면, 광해군과 연산 그리고 세조일 것이다. 그러나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당성에 있어서는 가장 안좋은 쪽에 있는 것이 세조인 것은 나머지 두 임금과 차별이 되는 점이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세조는 김종서와 같은 명장과 사육신으로 일컬어지는 충신을 참하고, 어린 조카인 단종을 사사하는 비정한 왕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역사를 냉정하게 바라보자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에서 왕권강화와 제도와 법을 정비한 그의 치적을 높이사 집권의 결과론적 당위를 인정받는 의견도 팽배하다.

    <내일의 여는 역사>에서 강제훈 연구원의 글을 읽노라니 세조의 치적에 대한 다른 견해에 대해 흥미로운 면이 있어서 소개한다. 세조임금의 집권을 통해 왕권이 강화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세조임금은 제도와 법률을 정비한 업적과는 달리 시스템에 의한 정치보다는 신권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왕권을 행사한 임금이었던 모양이다.

    예를들어 세종 때 시행하던 조회를 다시 부활시켰으나 아침의 맑은 정신으로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아침부터 술자리를 열었고 그런 술잔이 오고가는 자리에서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곤 했다. 또한 반대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겐 술을 더욱 마시게 하여 취중에 실수한 것을 빌미를 숙청하는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서도 언론인들이 좋아하는 폭탄주 모임 취재나, 회사에서도 술자리를 빌어 합리적이지 않은 인사평가나 의사결정이 있는 것을 보면 과히 씁쓸한 장면이다.

    따라서 세조는 자신의 했던 많은 업적이나 제도를 자신이 몸소 실천하기 보다는 일단 만드는 데 급급했으며 그 만드는 과정에서 있어서도 독단적으로 갑자기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집권의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치적에 목메는 경우가 많은데, 세조 역시도 부왕인 세종임금의 업적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세조임금의 이런 독선적인 면을 보면서 영조나 정조 임금 시기의 그 치열했던 군신간의 토론과 붕당정치를 볼 때 그들의 선대임금인 세조는 비교적 얼마나 강력하고(?) 편안한 정치를 했구나 하는 하는 생각이 든다.

    세조임금은 결국에 집권의 정통성은 차치하더라도 국정운영 스타일 등을 고려할 때 왕권을 강화했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그냥 평범한 임금이었다는 평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조, 비범한 임금? 평범한 임금!, 강제훈 서울시사편찬연구원, 2006년 가을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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