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
신채호
신년의 만필이 무엇이냐? 신년의 연하장을 올리려 하나 병세가 위급한 병자에게 만수무강의 축사를 드림과 같고, 신년의 감상담이나 쓰려 하나 구름처럼 떠다니는 방랑객이 지나치게 명사의 버릇을 배움이 주제넘은지라, 신 것·매운 것·단 것·쓴 것·생각하는 대로 쓴 글인 고로 '신년의 만필'이라 이름 붙이노라.
1. 도덕과 주의의 표준
옛날의 도덕이나 금일의 주의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일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면 『청구리담집』에 보인 것과 같이 나무의 그늘에서 삼복의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지원의 『호질문』에서 말한 것 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 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문제 뿐이다.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서 이해 표준의 크고 작고 넓고 좁음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참뜻을 잘 이해하여 자기편의 이익을 구함으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
2. 이해와 권형(權衡)
도덕과 주의가 인류의 이해의 표준에서 생기었다 하면 우리가 손해를 피하고 이익만 취함이 가할지니, 그러면 나라를 팔아 한 몸과 한 집안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것을 구하는 것이 가할까? 한규설과 같이 이등박문의 호령에 어린아이처럼 울고 도주하여 재산문서를 안고 일생을 애첩의 품에서 보냄도 가할까? 일진회같이 합병을 선언하여 노예의 구차한 삶을 얻음도 가할까? 참정권 같은 것이라도 운동함이 가할까? 이러한 좁은 시야의 이해는 이해가 아니다.
입과 배를 채울 수 있을지라도 사람의 몸이 개·돼지로 타락된다 하면 이익이 아니라 손해뿐이며, 한 몸의 안락을 얻을지라도 부모·형제·자매·친척, 현재의 동포, 미래의 자손을 노예문서에 울릴진대 이익이 아니라 손해뿐이니, 그러므로 개인이 되어서는 이완용·한규설이 되지 않고 민영환이 됨이며, 단체가 되어서는 일진회가 되지 않고 해산·체포 등을 당하는 단체가 됨이며, 사회를 위하여는 미국보호의 선정을 받는 이보다 차라리 독립자유의 가혹한 정치하에서 생활함을 좋아한다는 필리핀 모 지사의 언설이 있으니, 이는 다 소극적 방면에서 타산한 이해요, 혹은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혹은 계급의 평등을 위하여 눈앞에 천리에 뿌려진 피와 백만이나 스러진 시체의 처참한 피해가 있음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실제상 혹 정신상의 어떠한 이익을 취하나니, 그러므로 성공한 러시아의 공산당이나 실패한 에이레의 싱픈당이 같이 인류의 교훈을 끼침이니, 이는 적극적 방면에서 타산한 이해이다. 매양 눈앞의 이해만 타산하여 "인구 감소의 화만 입을 것인가"고 갑의 행동을 비난하며 "경제 손실의 해만 있을 것인가"고 을의 주장을 조소하는 자가 많으므로 이미 작고한 어떤 이가 말하되 "나는 학자들 보기가 싫습니다. 누구의 무슨 일에든지 학자들은 대소강약의 숫자적 비교의 안목으로 반드시 패한다는 단안을 내립니다. 반드시 패하고 반드시 망한다 할지라도 아니할 수 없는 일이 있는 줄은 요새 학자의 모르는 일입니다"고 하였다.
아, 눈앞에만 보이는 크고 작고, 많고 적은 차이나 비교하는 짧은 안목의 학자야 무슨 학자이냐. 우리의 경우는 아무리 반드시 이루고 반드시 흥한다는 합리적·숙명적 운동이라도 최근의 단기간 내에서는 실패 뿐, 사망뿐일 것이 명백하다. 학자나 주의자나 운동자나 스스로 그 같은 얕은 언론행동을 버리어라. 그리하여 어떤 이의 저승에 있는 영혼의 노여움을 받지 말 지어다,
3. 병을 따라 약을 쓰자
우리 조선이 고대부터 고정된 계급제가 있어 고구려의 오부, 백제의 팔성, 신라의 삼골이 모두 귀와 부를 소유한 자의 별명이다. 미천왕이 어릴 때 남의 집 하인이 되어 주인이 편안하게 잠자도록 문앞 못 속에 우는 개구리를 쫓느라고 밤을 세우며, 김유신이 큰 공로를 세웠음에도 왕경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앉지 아니하려 한 모든 역사가 그 생활이 서로 현격히 다르고 차별이 엄격함을 말한다. 우리 조상들이 이것을 타파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하여 반역혁명의 발자취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도 자주 나타났으나 당나라의 외침이 고구려·백제 양국을 유린하여 그 싹이 꺾이었으며, 고려 일대에 더욱 양반 대 군주의 쟁투, 노예·잡류 대 양반의 쟁투에 누차의 유혈이 있었으나 몽고의 외침을 당하여 그 영향이 소멸하였으며, 이 태조가 고려대의 사제유폐를 개혁하여 빈부의 조화를 도모하였으나 귀천의 계급이 존재함으로 오래지 않아 다시 그 틈이 벌어져 소년계·검계·양반살륙계 등 비밀혁명단체가 어지러이 일어나더니 또한 임진란의 팔년 병화로 말미암아 팔도가 큰 상처를 입으매 드디어 그 종자까지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 같이 사회진화의 경로를 개척하려는 혁명이 매양 반혁명적 외침 때문에 붕괴됨을 보면 이제 송곳 하나 박을 땅도 없이 타인에게 빼앗기고, 소수의 소상업가들은 선진국 생산품의 수입을 소개한데서 떨어지는 밥풀을 주워 먹게 되고, 경찰들과 군대가 끊임없이 위압을 주는 판에서 사회의 조직부터 개혁하려 함은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 아닌가 한다. 오직 농민운동 같은 것은 지주의 진악을 억제하여 일시의 급박한 동포의 궁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이는 시대조류의 혜택이 아니라 할 수 없다.
4. 유산자보다 나은 무산의 존재를 잊지 마라
연전 상해에서 『민중』이란 주일신문에 어떤 문사가 이러한 논문을 썼다.
"조선인 중에도 유산자는 세력있는 일본인과 같고, 일본인 중에도 무산자는 가련한 조선인과 한가지니, 우리 운동을 민족으로 나눌 것이 아니요, 유무산으로 나눌 것이다"고.
유산계급의 조선인이 일본인과 같다 함은 우리도 승인하는 바이거니와, 무산계급의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본다 함은 몰상식한 언론인가 하니, 일본인이 아무리 무산자일지라도 그래도 그 뒤에 일본제국이 있어 위험이 있을까 보호하며, 재해에 걸리면 보조하며, 자녀가 나면 교육으로 지식을 주도록 하여 조선의 유산자보다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뿐더러 하물며 조선에 이식한 자는 조선인의 생활을 위협하는 식민의 선봉이니, 무산자의 일본인을 환영함이 곧 식민의 선봉을 환영함이 아니냐.
수백 년 비열한 외교 밑에서 생장한 식민지 백성들인 까닭에 무엇보다도 외교를 중시하여 매양 위급 멸망의 때를 당하면 제3자에 대한 외교는 물론이거니와, 곧 위급멸망의 화를 가하려는 상대자에 대한 외교까지도 서둘러서, 갑진년과 을사년의 사이에 일본정부에 올린 장서가 날로 날 듯하며, 일본인 통감 이등박문에게 바치는 진정서가 빗발치듯하며, 오조약 체결할 때는 신문지에 오적을 베이는 필검이 삼엄하지만, 일본대사 이등박문에게는 애걸의 뜻을 표하며, 독립자강으로 주의 삼는다는 대한자강회에 일본인 협잡배의 대원장부를 어른으로 모시더니, 오늘에 와서 주의를 부르고 강권을 반대하지만 기실은 정부가 민중으로 변할뿐이며, 집정대신이 일본 무산자로 변할 뿐이며, 통감 이등박문·군사령관 장곡천이 편산잠·계리언으로 변할 뿐이니, 변하는 것은 그 명사 뿐이요 정신은 의구하다. 그러나 민중의 외교도 매양 생활의 이해가 낙착되나니, 일본 무산자를 조선인으로 본다 함이 강한 민족에게 아첨하는 못난 비열함이 아니면 종로거지가 도승지를 불쌍타 하는 지나치게 어짐이 될 뿐이다.
5. 신청년도 도로 구청년이 아니냐
"40 이상은 다 죽여야 되겠다"는 소리가 신청년의 입에 오르내린지 오래이다. 몇 마디 조리없는 연설로 일시에 선생의 존칭을 얻은 20년 전의 구청년인 40이상은 마치 가치없는 물건이 의외의 시세로 폭등하다가 그 시세가 지나가면 다시 폭락하듯이 아주 시세를 잃고 죽은 사람들이니, 더 죽일 것도 없거니와 30이하의 신청년들은 산 것이 무엇이냐? 과거를 부인하지만 옥으로 만든 탑도 부수며 보석으로 만든 탑도 부수어라 하는 러시아 허무당 시대의 부인이 아니라 다만 소극적 부인뿐이며,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말자 부르짖지만 뜨거운 피와 용기가 없으므로 다만 시대에 아부하여 용인받는 노예가 될 뿐이며, 서간도의 십만 명 양병과 미국의 일억 만원 차관을 장담하던 구청년의 과대망상도 밉지만 이삼백 명 유학생의 사회에서 매달 3,4원의 비용을 들여 간행하는 십여 장의 속쇄판 잡지는 더욱 가련하며, 신구서적에서 한 권의 책자도 보지 않고 다만 예배당의 찬미와 무쇠주먹·돌근육의 미친 노래로 생활하던 구청년 거동도 찬양해 줄 수 없지만, 정치적·경제적 현실의 고통에서 도망하여 신시·신소설의 피난생애로 일생을 마치려는 신청년의 심리야 참말 애석할 만 하다.
이같은 퇴패한 의기로는 설혹 학업을 성취할 지라도 학교의 교사가 되거나 혹 외국인의 회사의 직원이나 되어, 자기의 밥벌이나 할 뿐이요, 설혹 해군·육군·비행대의 장교가 될지라도 그 받는 월봉으로써 자기 집이 따뜻이 있고 배불리 먹는 것이나 도모하며 빈궁한 동포나 거만하게 내려다 볼 것이니 뜻 없는 자의 지식이 쓸데 있겠는가. 마치 민영휘의 금전이 사회운동에 쓸데없음과 일반일 것이다.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 이 글이 가장 병에 맞는 처방이 될까 한다.
6. 痛斥할 사회의 양대 악마
우리가 통렬히 배척할 바는
일은 형식화니 - 삼강오륜이 지금에는 붕괴되지 아니할 수 없는 도덕이 되었지만, 조정암·김충암 등 기묘 선현의 왕래한 편지와 그들의 행사를 보면, 수천 년의 낡은 풍속을 소탕하고 공자교화의 이상국을 건설하려던 성의와 세력을 흠모·감탄할 만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이매 그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아 어떤 마나님의 상사인지 알지 못하고 통곡하는 충성스런 종도 있었다하거니와,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삼년간 무덤을 지키는 효자도 없지 아니 하였다. 그리하여 이조 말년의 집집마다 효자요 사람마다 충신이던 사회가 마침내 소수의 적신을 목 베어 없애지 못하였음은 정신없는 형식이 인간세상에서 전쟁하는 무기가 아닌 까닭이다.
오늘 날에 주의의 간판을 붙이며 자유·개조·혁명의 명사만을 외우는 형식적 인물의 마음보다 주의대로 명사대로 혈전하는 정신적 인물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이며,
이는 피란의 심리니 - 온 조선사람이야 다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살면 그만이라고 정감록의 십승지를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은 오늘날에는 거의 없어졌겠지만, 그러나 그 심리는 의구하다. 불평등한 이 세계를 한 번 뒤집어 모든 동포가 더 행복을 누리자는 심리가 아니요, 오직 한 몸 한 집을 살자는 생각으로 찾아가면 각 과학의 지식을 얻는 중학교·대학교 … 모든 학교도 정감록의 청학동이며, 시와 소설을 짓는 문단이나 논설기사 등을 편집하는 신문사도 정감록이 철옹성이다. 난을 평정할 인물은 많이 나지 않고, 난을 피하는 인사만 있으면 그 난은 구제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모두 피난심리라는 큰 적을 평정하여 없애야 할 것이다.
위의 두 전쟁에 성공하면 그 다음에 선을 행한다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아니니, 선과 악은 절대적이 아니요 상대적인 까닭에,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까닭에, "사회를 위하여 공을 못 이루거든 차라리 죄라도 지어라" 할 것이다.
7. 문예운동의 폐해
낭만주의·자연주의·신낭만주의 등의 구별도 잘 못하는 자로, 현대에 가장 유행하는 요란한 서방 문예가들의 유명한 소설이나 극본 등을 거의 눈에 대어 보지 못한 완전히 문예의 문외한이, 게다가 십여 년 해외에 앉아 조선 문단의 소식이 끊기어 무슨 작품이 있는지 얼마나 나왔는지 어떤 것이 환영을 받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조선 현재 문예에 대하여 가부를 말하랴.
다만 3·1 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된 것은 문예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제압박이 아무리 심하다 하나 굶주린 귀신의 금강산 구경 같은 문예작품의 독자는 없지 않으며, 경성의 신문지에 끼어 오는 서점 광고를 보면 다른 서적은 거의 15년 전 그때의 한 꼴이나 시인과 소설선생의 작품은 비교적 다수인 듯하다. 그래서 나의 두서없는 글이 문예에 대하여 망녕된 논평을 한 마디 하려 하나 아는 재료가 없어 남의 말이나 소개하고 말려고 한다.
일찍 중국 광동의 『향도』란 잡지에 그 호수가 몇 호인지 작자가 누구인지를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국 신문예에 대한 탄핵의 논문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중국 연래에 제1혁명, 제2혁명, 5·4운동, 5·7운동 … 등이 모두 학생이 중심이었다. 그러더니 요즈음에 와서는 학생사회가 왜 이렇게 적막하냐 하면, 일반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여, 문예의 별천지로 안락국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절의 시나 몇 줄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그 생활비가 넉넉히 될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는 시인이나 소설가라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무한한 염복을 누리게 되므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포되어 갇히거나 총 맞아 죽을 위험은 없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됨으로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이 적어지며, 문예품의 독자가 많을수록 운동가가 없어진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에, 3·1운동 이후에 적막해진 우리 학생사회를 연상하였다. 중국은 광대하고 깊은 대륙인 고로 한 가지의 풍조로써 전국을 멍석말이할 수 없는 나라 이어니와, 조선은 청명하고 좁고 긴 반도인고로 한 가지의 운동으로 전 사회를 곶감꼬치 꿰이듯 할 수 있는 사회니, 즉 3·1운동 이후 신시·신소설의 성행이 다른 운동을 없앰이 아닌가 하였다.
8. 예술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중 어떤 것이 좋은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설혹 신시와 신소설이 성행하는 까닭에 사회의 모든 운동이 적막하다 할지라도, 만일 순예술주의자들로 말하면 "가난한 처의 단속곳을 팔아서라도 훌륭한 몇 짝의 신시를 씀이 가하며,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재미있는 몇 줄의 신소설을 바꿈이 가하다" 하리니, 그까짓 운동의 적막 여부야 누가 알겠느냐 하리라.
중국의 존화주의를 위하여 조선이 존재하며, 삼강오륜을 위하여 민중이 존재하며, 권선징악을 위하여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 기타 모든 것이 스스로의 존재할 목적이 없이 다른 무엇을 위하여 존재한 줄로 단정한 수백년 이래의 노예사상에 대한 반감으로는, 현 세계에 인도주의의 문예가 예술주의의 문예를 대신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 예술지상주의도 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술도 고상하여야 예술이 될 지어늘, 귀족자제의 육체의 노예가 되려는 자살귀신 강명화도 열녀로 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 수백만의 배고픈 귀신을 곁에다 두고 1원 내지 5원의 소설책이나 팔아 한 번의 배부름을 구하려는 문예가들이 무슨 예술가이냐? 금강산의 경치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배고픈 어린아이의 눈에는 한 숟가락의 밥만 못하며, 솔거의 소나무 그림이 아무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물에 빠진 자의 눈에는 한 조각의 목판만 못하며,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된 조선 민중의 귀에는 모든 아름다운 가극과 소설의 이야기가 백두산 속 미신광인 조 선생의 강신필만 못하리니, 1원이면 한 집안 식구의 며칠 생활할 민중의 눈에 들어갈 수도 없는, 2원 3원의 고가되는 소설을 지어놓고 민중문예라 부름도 얄미운 짓이거니와, 민중생활과 접촉이 없는 상류사회 부유하고 귀한 집안의 남녀 연애사정을 그림을 위주로 하는 음란을 장려하는 문자는 더욱 문단의 수치이다. 예술주의의 문예라 하면 현재 조선을 그리는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인도주의의 문예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인도가 되어야 할 것이니, 지금 민중에 관계가 없이 다만 간접의 해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는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 구주 각국에는 매양 문예의 작품이 혁명의 선구가 되었다 하나, 이는 그 역사와 환경이 다른 까닭이니 조선의 현재에 비할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