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시대.. - 80년대를 회상하는 많은 이들에게 팔십년대는 폭풍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해방이후 우리사회의 폭력과 억압의 지배가 가장 정점을 이룬 5공시대..동시에 해방이후 가장 활발한 저항정신과 다양한 사상의 발현으로 혁명을 꿈꾼 그 시대..그리고 그 젊은이들..
지금은 30대가 되어 있을 그 젊은이들에 대한 특히 그 시대를 대학생으로 지냈던 80년대 학번인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어쩌면 97년 현재에서는 관심밖으로 밀려 났을지도 모를 그들에 대한 그 시절에 대한 상념을 최초로 그려낸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러시아 이고 사람들은 송년회를 하기 위해 모인다.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대변하는 듯한 중기는 80년대에 죽어간 동지들을 회상하고 그 속에서 배신이던 아니던 어떠한 경로로 살아 남은 자신의 처지를 자괴하고, 또 지금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가 흔히 그리는 일반적인 80년대의 젊은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칭 속물로 표현되는 수진이네 일가는 운동을 젊은 날의 통과의례정도로만 인식하는 즉 현실세계에 적당히 타협하고 그속에 순응은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컴플렉스를 그때 운동을 했던 동료들에 대한 자기 허위의 기제로, 즉 그들에 대한 배려로서 자기 합리화 내지는 위안을 삼고자 한다..
트로츠키를 신봉하는 이상주의자적인 혹은 극단적인 사회주의자인 기웅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조급하고 혹은 경솔한 자기 회의 속에서 번민하다가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은정이란 인물은 운동을 인간관계 속에서만 한정시키고, 그저 지성인의 교양쯤으로, 지적유희의 요소로 보는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다. 주인공인 선재만큼 비중이 있는 이 영화의 중요한 화두를 전하는 인물인, 같은 80년대라는 시공간을 대학생이 아닌 임금노동자로 살아온 완구는 찻집에서의 대화를 통해 80년대를 대학생으로서 살아온 이들에게, 그들과는 달리 생활로서 러시아에 들어 오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켜주면서 현실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또 다른 희망의 기운을 표명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선재'는 그들의 모두의 삶의 방식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중기에게 애정을 느끼고, 또 생활인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지만, 중기와의 다툼으로 싸우고 나가는 장면에서, 그날 낮에 스키장에서 중기와의 키스에서 암시되었던 현실과의 적응과는 다르게, 선재의 흐느낌으로 대변되듯이 계속 자기 자신과의 심한 갈등과 괴리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어떠한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선재의 부유(浮遊)가 극명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특정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라기 보다는 위와 같은 인물들의 하룻동안의 만남을 우리에게 그냥 보여주고 있는 형식이다. 그저 어떠한 인위적인 장치가 없이 다큐멘터리 식의 보여줌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군데군데 연극적인 요소도 보인다. 배역의 특징으로서는 '선재'역으로 나오는 김선재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마추어 배우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우가 아닌 배우들이 나온다..
이는 선재역만 현실배우가 분함으로서 실제인물이 분했던 타 역할에 비해 차별성이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80년대 실제 인물들인 배우 아닌 배우들은 오히려 이런 캐스팅으로 인하여 과거의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전달자로서의 주인공은 반대로 배우가 연기를 함으로서 비중있는 역할로서 부각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칼라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나오는 현실에서 죽은 애인의 사진 앞에서 유일한 연기자이고 감독의 화자인 주인공은, 신발을 한짝만 신은 채로 흐느끼며 지나온 팔십년대의 시대와 미완의 혁명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1997/봄
[필름2.0 인터뷰: TALK2.1 : <선택>의 배우 김중기]
2003.05.18 / 이지훈, 최광희 기자
김중기만큼 파란만장한 이력을 거친 배우도 드물다. 혹자는 그를 통일로에서 태극기를 두르고 내달리던 전대협 조국통일위원장으로 기억한다. 어떤 이는 <둘 하나 섹스>의 원초적인 몸짓으로, 혹은 <정글쥬스>의 그로테스크한 미소로 그를 기억하고… 한때 그는 FILM2.0의 온라인 편집장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홍기선 감독의 영화 <선택>에서 전설적인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역을 연기했다. 극에서 극을 오간 좌충우돌의 10여 년 동안 배우 김중기는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했나, 그리고 무엇을 얻었나.
최광희 기자(이하 '최') <선택>은 언제 개봉하는 건가? 김중기 (이하 '김') 원래 6월쯤 하려고 했는데 배급 방향을 쉽게 못 정하는 것 같다. 감독은 제대로 배급을 하고 싶어한다. 이지훈 기자(이하 '이') 제대로라면? 김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향을 말하는 거다. 감독이나 제작자 입장에선 그게 당연하지. 8월 블록버스터 시즌이 끝난 뒤에 개봉하는 걸 고려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보통의 영화들과 똑같은 방식의 개봉을 원하는 것 같다. 이 완성된 영화는 봤나? 김 봤다. 시나리오대로 나왔는데 정석 그대로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투르기나 캐릭터간의 갈등 구조라든지 뭐 그런 것들에서. 정석적인 만큼 장단점도 가지고 있다.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적어도 어렵다는 사람은 없더라. 아쉽다는 사람들한테서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을 취할 수도 있었는데 너무 꽉 짜인 구조로 간 게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 최 꽉 짜여 있다는 건 드라마가 관습적이라는 얘기인가? 김 관습적이라기보다 고전적이다. 약간은 휴먼 드라마적인 느낌도 있고. 이 그동안 홍기선 감독의 영화들은 소재도 무거웠지만 이야기를 푸는 방식도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김 예전에 누가 어느 글에선가 홍기선 감독에 대해 ‘비린내 나는 리얼리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그런 냄새는 여전한 것 같다. 구더기가 나오는 장면을 실제로 찍고 싶어한다든가 하는 뭐 그런 스타일.(웃음) 이 처음엔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김 전화 받고 출연했지.(웃음) 작년 9월쯤에 조감독한테 전화가 왔다. 홍기선 감독이 나를 보잔다고 하더라. 그때 감으로 눈치를 챘다. 홍기선 감독이 <선택>이라는 영화를 준비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홍감독의 전작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봤는데 고전적인 리얼리즘 영화라는 느낌이 강했다. 힘이 있더라. 어떤 부분에선 굉장히 집요하고. 아무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갔다. 나는 출연한다 안 한다 별 얘기 안했는데 갑자기 홍감독이 다음 주부터 나와서 연습하자고 하더라.(웃음) 그 뒤로 고민을 좀 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데뷔작으로 해서 실험 영화적인 성격이 강한 <둘 하나 섹스>까지 하면서 자꾸 그런 배우로만 정형화되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으니까. <선택>까지 출연하게 되면 '김중기'라는 배우는 완전히 그런 쪽 배우로 찍히는 거 아닌가.(웃음) 그런데도 정말 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못하겠더라. 사실 어떻게 보면 나도 감옥 생활을 했었으니 김선명씨와 비슷한 점도 있고. 제안을 받고 고민을 하면서 '아, 어쩌면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우연한 계기들을 만나면서 자기 운명을 다르게 개척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구나, 어차피 내 운명이 이런 거라면 영광스럽게 받아들이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 홍감독은 캐스팅한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 김 별 얘기 하지는 않았는데 '딱 보자마자 김선명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러더라. 감독들은 주연 배우의 이미지를 직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출연작을 결정할 때 그 영화에 대해 동의를 하고 결정하나? 워낙 특이한 영화들만 해서.(웃음) <둘 하나 섹스> 같은 경우도 그 영화가 가진 주제나 스타일에 동의를 했던 건가? 김 (웃음) 충분히 생각하고 나 역시 인정할 수 있는 영화에 출연한다. <둘 하나 섹스>의 경우 성에 대해 좀 독창적으로 접근한 영화라 동의하기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 작품 역시 동의했었다. 시나리오가 약간 추상적이고 불친절한 면이 있었지만 캐릭터의 성격은 나름대로 잘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성된 영화가 생각보다 더 불친절하고 관념적인 면이 많았고, 그 관념이란 것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적어도 시나리오는 괜찮았다. 지금은 영화에서 섹스 얘기를 하는 것이 지겹겠지만 1997년 기획 당시에는 지금과 상황이 달랐다. 나름대로 파격적이고 신선했다.(웃음) 최 연기 생활 짬짬이 프로듀서 일도 하지 않았나? 김 영화세상에서 <언더커버>라는 작품을 준비하다 도중에 중단됐고, 알앤아이픽쳐스에서 장진 감독 프로젝트도 하나 있었는데 그 영화는 아예 장진 감독의 수다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신인 감독과 준비하던 작품도 하나 있었는데 감독이 건강이 안 좋아져 잘 안 풀렸다. 결국 실제로 제작한 건 없으니 프로듀서 일을 한 적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최 프로듀서 일은 원래 하려고 했던 건가? 김 그게 굉장히 복잡한 얘긴데… 1999년에 <북경반점>에 출연하고 나서 섭외가 꽤 들어 왔는데 어쩌다가 그냥 1년이 후딱 가버렸다. 그때 배우 일을 기다리면서 기획 일을 1년 정도 했었다. 하지만 영화가 엎어지고 미뤄지고… 그렇게 되면서 1999년 말쯤 되니까 '야 이게 뭔가, 내가 지금 뭐 하나' 싶더라. 사실 배우로서 승부를 걸겠다고 생각했으면 뭔가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는데 매니지먼트를 통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스스로 사람 찾아 다니면서 역할 달라고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다가 집안 사정상 더이상 놀고먹을 수도 없게 됐고, 마침 FILM2.0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온라인 편집장으로 일을 하게 됐던 거다. 처음부터 길어야 3년 만 하겠다고 얘기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거고 2001년엔 다시 현장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마침 영화세상 안동규 대표가 프로듀서 일을 해 보자고 해서 우연찮게 하게 된 거다. 그렇지만 FILM2.0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배운 게 많다. 연기를 하면서 배운 것보다 그때 짧게나마 직장 생활을 했던 것이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이 무슨 도움? 김사회 생활을 하니까 다양한 게 보이더라. 이를테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여러 가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게 무수한 이해관계와 속사정이 얽히는 건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런 것들에 직접적으로 부딪쳐 볼 수 있었다. 내가 학교도 오래 다니느라(웃음) 항상 학생으로만 살다 보니까 어른이 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배우 김중기라는 사람 안에 더 다양하고 깊은 것들이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그건 내 배우 생활에 엄청난 자산이고 프로듀서 일도 그런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 사람 만난다는 게 사실 참 피곤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욕도 먹고. 돌이켜보면 어차피 내가 사회 생활을 할 거면 더 복잡하고 진탕인 곳에서 했었으면 훨씬 더 도움이 됐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최 이력 중에 특이한 것은 1988년에 전대협 조국통일위원장을 했다는 거다. 학교 다닐 때 운동하던 선배들은 굉장히 냉철하고 전술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 근데 당신은 조국통일위원장 했던 사람 치고는 너무 비전술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런 사람한테 엄혹한 시대의 중책을 맡겼다는 게 좀….(웃음) 김 (웃음) 얘기 잘했다. 사실 나도 내 캐릭터를 잘 모른다. 배우를 하겠다고 하면서도 직장 생활이다 프로듀서다 한 3년 정도 외도를 했고 내면도 엄청 복잡하다. 세상을 볼 때도 어쩔 때는 이론적으로 봤다가 어쩔 때는 안 그런다. 어쨌든! 그래서 연기를 시작한 거다. 전략 전술적으로 살기 싫어서. 그 전에 이른바 운동권 일을 하면서 너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차라리 전략적으로 사고 안 하고 감성이나 충동에 따라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도 일면적이긴 마찬가지겠지만 그 전에 다른 한쪽의 일면이 강했으니까 다른 한쪽의 일면으로 나를 채워보고 싶었던 거지. 그 이후로 한 10여 년, 굉장히 다른 쪽으로 캐릭터가 쌓여진 것 같다. 최 그렇게 드라마틱한 반전을 시도한 배경에는 학생 운동에 대한 환멸도 작용한 건가? 김 환멸까지는 아니다. 일종의 반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반성을 너무 심하게 했거나 아니면 전혀 반성을 안 했거나 둘 중 하나다.(웃음) 운동하면서 제일 힘들었을 때가 1989년과 1990년 사이였다. 임수경, 문익환 목사가 연달아 북한에 갔을 때였다. 외부적으로 바깥일이 풀려야 사람 관계도 잘되는 건데, 나가면 항상 지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직 안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갉아먹는 상황이 됐다. 그거 정말 사람 미치게 하더라.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거의 정신병 일보 직전까지 갔고, 숨이 넘어간다는 게 뭔지를 이해할 정도였다. 이 사람 만나는 거 힘들어 하고, 적극적으로 어디 나서는 걸 싫어하는 성격 같은데, 어떻게 조국통일위원장까지 하게 됐는지 의아하다. 김 그게 말하자면 80년대의 아이러니지.(웃음) 80년대의 사람 관계라는 건, 조직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관계였다. 그 안에서는 편한 동료 의식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선후배 관계라기보다 전부 형, 동생 사이였고. 그래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최 학생 운동 시절에 가졌던 세계관이 지금의 배우 생활에 아무래도 영향을 줬겠지? 김 그렇다. 아무리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해도, 그래도 어느 구석에서는 어쩔 수 없이 80년대의 김중기가 나온다. 그때 축적된 경험은 내 안에 벌써 들어가 있다. 그건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최 이른바 386 세대의 정점을 살았던 건데, 요즘은 386 세대조차도 ‘80년대적이라는 것’을 대상화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읽는 방법론은 폐기 처분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영웅화하면서 시대와 대화하는 통로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당신은 어떤가? 김 그건 개개인의 문제라고 본다. 보편적으로 묶을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들어가보면 80년대에 어떤 생각으로 운동을 했으며 그 이후에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과 노력의 문제이지, 뭉뚱그려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건 잘못된 반성일 수도 있는데, 내 경우엔 적어도 권력이나 권위를 갖는 위치에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치권에 나가 있는 친구도 있고, 이번에 청와대 비서실에 간 친구도 있는데… 모르겠다. 결국 개개인의 문제가 아닐까? 이 그렇다면 당신에게 80년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오류로 점철된 시기였나, 아니면 나름대로 획득한 게 많았던 시기였나? 김 장점은 늘 단점과 연결돼 있다. 절대적인 완벽성은 없다고 본다. 80년대에도 당연히 오류가 있었다. 그거 인정한다. 그게 바로 내가 반성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때 형성된 가치관이나 세계를 보는 눈 역시 나에겐 중요한 것들이었다. 이 너무 딱딱한 얘기만 한 것 같다. 연기 얘기 좀 해 보자. 그러니까 결국 배우를 선택한 건 그 전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 연기에 대한 취향이 있었던 건 아니라는 말인가? 김 맞다. 굉장히 의지적으로 했던 거다. 이쪽을 했으니까 저쪽으로 가보자 했던 거지. 최 그렇게 시작한 연기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 김 죽기 전까지 종국적으로 보여줄 것의 50%까지는 와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의 경우,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80% 정도를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도 그렇고, <선택>도 그렇고, 내 얘기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기를 잘해야 하는 것 이전에 인물을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많았다. 홍기선 감독은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보라고 그랬는데 만나면 더 부담을 갖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만났다.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영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고…. 원래 내 연기가 좀 강한 편인데, 그걸 조금 더 컨트롤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대중을 유혹에 돈을 벌어들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학생 운동을 했던 입장에서 보면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김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 다만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가진 문제들을 지적할 수는 있다. 그건 좀더 풍부한 관점을 대중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순전히 상업적인 속성에서 벗어난다. <살인의 추억>을 봐라. 나름대로 현실에 대한 시각을 제공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사랑받고 있지 않나. 그런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한다. 이 일반 상업 영화에 출연했던 모습들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정글쥬스>에서 맡았던 ‘빨간 잠바’의 미소는 직접 만든 건가? 야비하면서도 뭔가에 취해 있는 듯한 그 미소는 꽤나 독특했다. 김 100% 내가 만든 거다.(웃음) 연극하면서 리처드 3세의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호주 연출가가 호흡을 다르게 쓰는 방법을 얘기해줬다. 캐릭터에 전형적으로 묻히지 않고 좀 다른 색깔을 내는 호흡. 그때 악역이면서도 약간 변태적인 사람들의 호흡을 많이 고민했었던 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런 호흡으로 '빨간 잠바'를 연기했던 거다. 이 할리우드만 봐도 상업 영화긴 하지만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작품들에만 지속적으로 나오는 배우들이 있다. 당신이 가야할 길도 그런 쪽이 아닐까? 김 음,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정글쥬스>도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영화였으니까. 현재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 캐스팅된 상태인데 그 영화 역시 그런 면이 있다. 괜찮은 길인 것 같다.(웃음) 이 요즘 생활은 어떤가? 궁해지면 언제든 또 외도를 할 수 있는 건가? 김 사실 5개월째 아내에게 용돈을 타 쓰고 있는 상황이다.(웃음)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좀 나아질 것 같다. 일단 아내가 유학을 갔다 와서 대학 강사 일로 버니까. 이젠 일년에 영화 한두 편만 출연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뭐 큰돈 벌 욕심은 없으니까. 생활만 되면 된다. 최 생활이 된다는 건? 김 생활비 쓰고 노후 대책을 위해 조금이라도 저축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뭐. 한편에 1천만 원 정도 받는다면, 연간 2천만원 정도는 되고 아내가 버는 돈 1~2천 만원을 합하면 대충 먹고살 수 있다. 이 지금도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지 않나? 김 가끔 그렇다. 하지만 발언하지 않는 것은 발언하는 사람들만큼 강하게 솟지 않기 때문일 거다. 그런 건 있다. 사회에 대한 발언 욕구라기보다는 내 선택이 어떤 고려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100% 숭고하고 순수한 결단이기를 여전히 바라는 마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최 계속 배우 생활을 하려면 자기 매니지먼트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 안 그래도 극장 사업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매니지먼트를 같이 한다. 그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1주일 전부터 정식 소속 배우가 됐다.(웃음) 이 나이에 대한 강박도 있을 텐데. 김 없을 순 없겠지. 특히 한국에선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배우의 나이 제한 같은 것이 있는 상황이니.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내 스스로의 자신감은 있다. 아직도 20대 중반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낸다. 그만큼 젊다는 얘기다. 특별히 인간이 망가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젊게 살 수 있다. 내 자신이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도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 당신에게 배우로서의 꿈은 어떤건가? 김 '빨리 영화를 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 때문에 사실 그런 생각을 별로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엊그제 TV에서 <한민족 리포트>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러시아 연극에 관해 어떤 관객이 인터뷰하면서 “배우는 인생의 교사”라는 얘기를 하더라. 그때 '아, 내가 저렇게 되려고 배우를 시작한 건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프로필 1966년생 | 1985년 서울대 철학과 입학 | 1988년 전대협 조국통일위원장, 남북청년학생회담 추진으로 투옥 후 집행 유예 | 1994년 연극원 입학 | 1999년 FILM2.0 온라인 편집장 | 2001년 영화세상 프로듀서 | 필모그래피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 <둘 하나 섹스>(1998) <연풍연가>(1998) <북경반점>(1999) <정글쥬스>(2002) <일단 뛰어>(2002) <선택>(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