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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끼루 (生きる: Living, 1952)
    영화이야기 2010. 12. 29. 18:50

    첫번째 반은 30년 근속, 메피스토, 술, 여자, 빠찡꼬, 그리고 위암이다. 나머지 반에는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오롯이 내 의지라는 환희와 연대하지 않는 희망은 결국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좌절하게 된다는 메세지.

     

    이키루(1952) - 왓챠피디아

    주인공은 어떤 도시의 시청에서 근무하는 노년의 남자. 시민 과장이란 직위는 있지만 매일 출근해서 서류에 도장을 찍는 기계다. 말수도 적고 인간관계도 서투른 그는 부인을 잃은 후 외아들에

    pedia.watcha.com

    흔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3대 명작이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그리고 이 작품 <이키루>라고 한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가게무샤>라던가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이 작품은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이 영웅이 시대를 만나 조응의 울타리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고찰이어라고 한다면, <이끼루>는 평범한 사람이 시대를 통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결국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전후 50년대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한 <이키루>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시청 시민과의 과장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자식을 위해서 재혼도 하지 않고 직장에서는 30년 또한 결근 한번이 성실한 삶을 살았던 그는 비로소 움직이는 '미이라'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이때 그에게 남은 건 후회와 번민 그리고 분노이지만, 결국엔 이 모든 감정은 그의 '생명력'을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아니면 잊고 있었던 삶에 대한 강한 후회는 상투적이게도 쾌락을 통한 보상심리로 나타난다. 영화 속에서도 소위 '메피스토'라 불리우는 자유분방한 젊은 소설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술과 여자 그리고 클럽을 전전하며 지난 인생에 대한 위안을 얻고자 한다. 몇십년을 쓰고도 남은듯한 낡고 평범한 그의 중절모를 작부에 뺐겨 화려하고 야한(?) 모자를 새로 사는 것에서 마치 그의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 상징처럼 느껴지게 된다.

    구로사와 감독 본인이 했던 "‎생명력 넘치는 인간이 그 생명력을 발휘할 때 악이 만들어지는데, 그 악을 자신이 컨트롤할 때 비로소 선이 생긴다"는 말처럼 와타나베는 타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위로받거나 피하려고 했던 수동적인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지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사직서를 쓴 젊은 여사원과의 스캔들을 보자면, 와타나베는 빵을 서너개씩 거뜬히 먹어치우는 식탐과 경박하면서도 자유롭게 발사되는 웃음소리를 지닌 젊은 그에게 위로를 받고자 했고 집착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에게 어울리는 생명력의 방향을 찾게 된다.

    좀전까지도 구걸하듯이 자신을 한번 더 만나 달라고 애걸해서 겨우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 젊은 여사원을 까페에 남겨두고 마치 '유레카'를 외치 듯 무언가 뛰쳐나가던 와타나베는 비로소 진짜 제 2의 삶, 어쩌면 자신의 첫번째 진짜 삶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예기치 않았던 영감만큼이나 전혀 상관없는 까페의 다른 일행에게 생일 축가를 응원처럼 받는 장면은 그래서 꽤나 의미심장하다.

    살아도 죽어있던, 죽어도 살아있는.

    그가 찾은 것은 삶은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으며, 마침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는 이타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시점도 달라지게 된다. 살아도 죽어있던 와타나베 씨에서 죽어도 살아있는 와타나베로 말이다. 영화 상에선 와타나베 개인이 극과 시간을 이끌어가던 전지적 시점에서 그가 죽기전까지 했던 일을 회고하는  관찰자 시점으로 전환된다.

    마치 '유레카'를 외치며 마지막 생명력을 발현하며 호기롭게 직장으로 복귀하던 모습의 와타나베는 '그는 6개월 후에 죽었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갑작스레 영정 사진 속의 모습으로 카메라에 드러난다. 무대는 그의 장례식장이다. 그가 숨을 다할 때까지의 기간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조문객들의 증언과 회상은 그의 마지막 생을 좀 더 객관적이고 또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마치 추리소설 같은 긴장감까지 선사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사건이후 죽기 전까지 시청에 복귀하여 썩은 하수물로 고생하던 주민들의 민원을 들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래서 결국 오염지역을 매립하여 놀이터를 조성하게 된다. 놀이터가 완성되고 얼마 뒤 추운 겨울날밤 와타나베는 놀이터 그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유족과 조문객들이 빈소에 모여 그간의 와타나베의 행적에 관해 서로 자신들이 겪은 에피소드와 견해를 얘기하게 된다. 선거를 앞두고 와타나베의 공적을 가로챌려는 부시장부터 그의 노력을 높히 평가하는 후배직원까지 와타나베  저마다의 목격담을 털어놓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씁쓸한 광경을 연출한다.

    결국 인간은 저마다 자기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고, 설사 와타나베의 행동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변화되기 쉽지 않다. 왜냐면 빈소의 군상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특히 회사나 국가라는 계급적 구조하에선 자신의 뜻대로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부사장이 공을 가로채버리는 와타나베의 귀감이 되는 행동은 같은 장면을 본 사람들에게도 제각각 반신반의하게 된다. 결국 그가 '말기 암' 환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해프닝 쯤으로 치부하려고 한다. 살아갈 날이 많은 자신들은 와타나베의 진심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한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는 연대하지 않는 우리 민중의 모습과도 같다. 와타나베의 진심을 알아채고 그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던 단 한명의 직원 역시도 다음날 다시 출근한 시청에서 대부분의 침묵 속에서 자신도 고개를 떨구게 된다. 연대하지 않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와타나베는 죽음을 얼마남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인생에서 주인이 된다. 그것은 상황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깨우친 생명력의 바른 발현과 그 의지때문이었다. 따라서 어색했던 와타나베의 중절모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그저 묵묵히 머리에 쓰는 모자였을 뿐이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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